할머니를 떠올리며 걸어본 대구 팔공산(八公山) 종주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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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설악산을 백담사에서 소청대피소까지 오르면서 봉정암에서 하산하시는 불자들과 교행을 하면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었다.

손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셔서 대학입학시험이 있는 이맘때 즈음이면 칠순이 넘으신 연세에도 팔공산 갓바위에 오르셔서 치성을 드리시던 분이셨다.

설악동에서 동동주와 감자전으로 하산주를 하면서 고글 아래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조만간에 팔공산을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동안 인연이 닿지가 않아서 오늘에서야 대구 팔공산을 찾아와 갓바위부터 파계사까지 17Km의 능선길을 징~하게 종주산행을 하여 보았다.







새벽 4시반에 갓바위지구 주차장을 출발하여 관봉, 삿갓봉, 동봉, 비로봉, 서봉, 파계봉을 경유하여,

오후 2시20분에 파계사지구 주차장에서 종주산행을 종료하였다.

여러번의 휴식과 2번의 알바를 포함하여 대략 10시간 동안 팔공산 능선길을 지겹도록 오르내렸다.







전날 구미 금오산 산행을 일찍 마치고 무궁화호 입석편으로 구미역에서 동대구역으로 이동하여,

든든한 저녁식사와 충분한 보급을 하고서는 401번 버스를 이용하여 갓바위 시설지구로 들어왔다.


나는 새벽같이 종주길을 나설 팔자라서 '갓바위 황토참숯굴'이라는 찜질방엘 7,000원을 내고서 저렴하게 묵었는데,

내 평생에 가 본 찜질방 중에서 가장 낙후된 시설이었지만, 샤워는 가능하여서 국립공원 대피소보다는 낫다고 위안을 하였다.







나는 남들 보다 산행 속도가 느리고 귀경을 위한 넉넉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새벽 4시에 출발할 예정이어서,

새벽 3시에 스마트폰 알람에 맞추어 기상하여 천천히 산행 준비를 하는데 바깥의 바람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출발시간을 30분 늦추어서 새벽 4시반에 찜질방을 나서서 돌계단을 뚜벅뚜벅 걸어서 갓바위에 올랐다.







오늘은 기온이 급강하 하였고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매우 이른 시간이어서 갓바위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몇 일 남지가 않아서인지 여러 명의 불자들이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옛날에 우리 할머니도 손주들의 대학합격을 위하여 갓바위 계단을 힘들게 오르셨을 생각까지 더해지며 숙연해지더라.







갓바위 시설지구부터 갓바위까지는 이 새벽에도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 걷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으나,

갓바위를 벗어나 팔공산 동봉 방향으로 능선길에 접어들자 칠흑같은 어둠을 헤드랜턴 하나로 헤쳐나가야 하기에,

노적봉 직전 선본재의 암릉 구간부터 심하게 알바를 하였다.

세찬 바람이 심술을 부려서 정상적인 등산로에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정말로 길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ㅠㅠ







혼자서 어둠속에서 찬바람과 추위와 싸우며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내가 이 짓을 왜 하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가,

이름 모를 봉우리를 오르면서 일출을 맞이했는데 세상 어떤 날의 해돋이보다도 너무나 장엄하고 반가운 햇님이었다.







햇님이 올라오고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의 레이다 기지도 멀리 시야에 들어오자,

조금 전까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탈출을 할까?' 하였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힘이 불뚝 솟아나더라.







내가 겨울 산행을 하면서 눈을 러셀한 경우는 있었지만,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을 러셀하면서 전진한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삿갓봉에서 잔돌들이 많이 들어간 등산화를 정비하고 당과 수분을 공급했더니 그제서야 팔공산의 아름다움이 눈에 훅하고 들어온다.







팔공산 정상부의 레이다 기지들이 한결 가까워진 것을 보니 동봉이 얼마 남지가 않았나 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산행 5시간 만에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났는데,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평소와는 달리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팔공산을 자주 오르신다는 대구 어르신이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등산객이 많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신다.







공식적인 팔공산 종주 능선길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언제 또다시 이 곳에 올까?' 싶어서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도 기를 쓰고서 알현을 하였다.







그리고 비로봉에서 능선길로 접근을 하다가 또다시 알바를 하였는데,

계획에 전혀 없었던 마애약사여래좌상과 우연치않게 조우를 하는 행운을 누렸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팔공산 종주 산행기를 읽으면서 동봉과 서봉의 사진을 많이 보았는데,

실제로 팔공산 능선길을 걸어보니 동봉과 서봉의 위상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조금 과장하여서 동봉, 비로봉, 서봉에만 올라도 팔공산의 80%는 보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서봉을 지나서 이름 모를 봉우리 아래에서 전날 동대구역에서 준비한 빵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배낭속에서 추위로 딱딱해진 빵이었지만 그래도 먹으니 힘이 나더라.







그리고 톱날능선의 가마바위봉을 우회하는 길에서는 순간적으로 잘못 진입하여,

오금이 저리는 낭떠러지와 바위 사이를 납작 엎드려서 어렵사리 통과를 하였다.







초반에는 종주길의 현위치번호가 너무나 자주(100m 마다) 있어서 공해라고 생각했었는데,

2번의 알바와 가마바위봉에서 식겁을 하고 나서는 현위치번호를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더라.







파계봉을 지나서 이제는 팔공산이 슬슬 지겨워지며 카메라를 꺼내기도 귀찮아서 사진도 거의 없다.

그래서 현위치번호 '141'인 파계사 삼거리에서 좌틀하여서 파계사 방향으로 후다닥 내려와 산행을 종료하였다.







팔공산이 왜 대구의 진산(鎭山)인지를 갓바위부터 파계사까지 길~게 종주를 하여보니 알겠더라.

추위와 바람때문에 고생은 하였지만 할머니를 떠올리며 걸어본 의미있는 팔공산 종주길이었다.


개인적으로 팔공산의 갓바위-파계사 종주는 광청종주보다 조금 더 힘이 들었다고 생각하며,

청계산의 이수봉이나 매봉과 같은 중간 보급처가 전무하여서 충분한 식수및 행동식의 준비와

지금같이 하루해가 짧은 시기에는 일찍 산행을 시작하여 여유있는 시간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


대구 팔공산 종주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꼭 해 보아야 할 재미있는 도전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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